5·18 민주화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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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성격
  • 유신독재의 붕괴, 10/26사건
  • 별들의 전쟁, 12·12쿠데타 - 암호명 '생일집잔치'
  • 신군부의 등장과 정권탈취 음모
  • 1980년 서울의 봄
  • 80년 봄 광주의 상황과 "5·17" 비상계엄령의 확대
  • 광주 민주화운동의 발발 - 작전명령 '화려한휴가'
  • 5월19일의 상황
  • 5월20일의 상황
  • 5월21일의 상황
  • 5월22일부터 25일까지의 상황
  • 신군부의 광주무력진압 '상무충정작전'
  • 5월27일 도청, 새벽의 마지막 불꽃
  • 민주화운동의 확산
  • 광주 민주화운동과 미국
  • 광주 민주화운동의 부활
  •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성격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진공상태를 메우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작전명령:충정작전)을 계기로 장차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 '제5공화국'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시민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사망자 155명, 행불자 81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상이 및 구금자 등 4288명(`15. 6. 현재)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공식통계이며 수사기간중의 불법연행자만 하더라도 3천 여명이었으며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당시에는 패배한 항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하여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키는 견인차로 등장한 것이다.

5·18이 민중항쟁으로 성격규정이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 당시 정부에 의해 '5·18'이 '광주사태' '폭동'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 등으로 발표된 뒤 광주시민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국민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88년 6공정권이 들어선 뒤 국민화합을 모색한다는 미명하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써 광주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또한 5·13 담화조치 이후 진행된 "역사 바로 세우기"는 5·18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80년 5월 광주를 무참히 짓밟은 신군부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그리고 정의에 의한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전국민과 광주시민에게 '과거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내란이라는 당시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아직도 살아있으며 재심을 통해서 반복되기까지 광주항쟁은 사법상으로는 지금도 내란이고 당시 참여자들은 폭도인 셈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 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양민은 정확히 몇 명인지 아직도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군부의 주역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역사와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지금까지 미궁 속에 빠져있는 진상은 앞으로 우리 세대가 안고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좌표를 설정하려면 확실한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그 역사적 의의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평가 하겠지만, 그간의 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이 거론되고 있다.  첫째,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군사 쿠데타를 통하여 4·19민주혁명을 부정하고 등장한 억압체제를 구축한 군사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땅의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자주·민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한층 발전시켰던 것이다.

둘째,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역동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중이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자·농민·빈민·학생·종교인·문화예술인·지식인·재야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되었다. 즉 이와 같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이 모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반성과 계승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당면과제를 인식하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 서양의 역사와는 달리 그 동안 우리의 역사에서는 권력에 대한 무력저항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자연권인 저항권의 정당성을, 나아가 저항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 받았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권력자에 의해서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비하되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다. 갑오농민전쟁, 의병투쟁 등도 아직 공식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민중이 갖고 있는 권리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넷째, 광주민주화운동은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결국 그 체계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각종 정보기구를 동원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자행하였지만,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터져 나오는 저항의 물결에 허덕이다가 결국 좌초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민주운동의 동력이었으며 역사적 근거이기도 했다. 나아가 '제5공화국' 청산하는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근거로써 과거의 부도덕한 정권을 청산하는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좌절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전진을 기약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자리 매김 해야 한다. 1980년 이후 전개된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무엇을 남기고 우리 후손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